전 세계에 영적 돌풍을 일으킨 베스트셀러 래디컬저자

데이비드 플랫의 화제의 신작!

20199월 미국 출간 즉시 아마존 종교 리더십 분야 1

 

래디컬로 전 세계를 향해 복음을 통한 철저한 돌이킴을 외치던 데이비드 플랫 목사의 신작이 출간되었다. 당시 그 책을 읽고 도전받은 이들의 삶은 지금 어떤 모습인가? 저자의 인생과 사역의 행보의 전환점이 된 8일간의 히말라야 트레킹을 생동감 있게 담은 책, 복음이 울다를 통해 오늘날 우리 내면과 신앙의 현주소, 그리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짚어 본다.

 

우리, 이대로 괜찮은가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여행객들이 경이로운 절경을 즐기러 히말라야로 모인다. 그런데 데이비드 플랫은 이 기막히게 비현실적인 자연 경관 속에서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보았길래 매일 숙소 바닥에 엎드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쏟아야 했을까? 미국 전역과 세계를 향해 예수의 복음을 힘 있게 외쳤던 저자가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고통의 민낯 앞에서 느낀 무기력과 내적 갈등, 말씀 안에서 눈앞의 현실을 바라보는 묵상을 날 것 그대로, 필터링하지 않고 담았다. 정말로 예수님이 세상의 소망이신가? 절박한 상황에 처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라는 부르심은 무엇인가? 영적, 육적으로 신음하는 세상을 위해 지금 우리의 일상, 뭔가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무엇이 바뀌어야 하나?

 

우리가 눈감아 온 세상,

우리가 모른 체한 사람들 때문에

복음이 울다

 

복음을 듣고도 삶이 변하지 않는 우리 때문에

이 땅의 복음, 예수께서 울고 계시다

 

저자는 히말라야 트레킹이라는 모험만이 아니라 고통 중에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과연 내 종교가 여타 종교보다 조금이라도 나은가?’ ‘영원한 고통이 진짜인가?’ 같은 까다로운 질문들의 답을 찾는 모험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깊은 절망과 더 깊은 소망을 넘나들며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솔직하게 보여 줌으로써, 교리나 설명으로서의 기독교가 아니라 피부에 와닿는 복음을 경험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이 책은 자신의 고난에만 매몰되어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심한 이 시대 신앙인들이 아파서 울고 있는 세상과 함께 울 수 있도록 독려한다. 또한 그럴듯한 말뿐인 기독교와 교회들,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세상적 로망을 품으며 살아가는 신자들을 일깨워 직업적인 소명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적 부르심을 알려 준다.

 

책 속으로

 

<20-21쪽 중에서>

내가 그 게스트하우스 바닥에 엎드려 흐느꼈던 것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고통에 관한 사실을 들었기 때문도 아니요, 성경에서 고통에 관한 새로운 발견을 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사실 나는 아시아로 가는 기나긴 비행 중에 이미 가난과 억압에 허덕이는 이들에 관한 충격적인 수치들을 전면에 내세운 설교 한 편을 완성했다. 그런데 그 설교를 쓰는 내내 내 감정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철저히 냉정한 상태였다. 가난에 관한 처절한 통계를 보고 나서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나는 조금도 가슴 아파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신음하는 사람들과 아이들의 얼굴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마주하고 나니 마음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

더 많은 수치를 보거나 더 많은 설교를 들어서는 (물론, 더 많은 설교를 해도)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말씀과 세상에 관한 더 많은 정보를 머리에 채우는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세상 속에서말씀을 경험하여 그 말씀이 우리 가슴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일이 진정으로 필요하다. 우리는 세상 구석구석, 우리 주변 사람들이 겪는 극심한 고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야 한다. 그러고 나서 우리의 힘으로 만들어 내거나 조작해 낼 수 없는 영혼 깊은 곳의 변화를 일으켜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이 책으로 드리는 나의 기도다.

 

<62-63쪽 중에서>

하지만 기도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적어도 당시 내 기분은 그랬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았다. 분명, 기도는 중요하다. 카말을 위해 온 힘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보다 더 귀한 일이 또 있을까? 하지만 딱 거기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멘이라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과연 우리의 기도로 카말의 삶이 크게 달라질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분명 기도가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카말을 기적적으로 고쳐 주실 수 있다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있지 않았다. 솔직히, 앞으로도 카말의 상황이 변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응답을 믿지도 않으면서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때의 공허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물론 기도는 절대 무의미하지 않다. 나는 항상 기도의 능력을 외치는 설교자다. 그런데 왜 내 마음 깊은 곳에 이런 의심이 도사린 것일까? 나의 공허한 믿음에 낙심한 이 순간, 애런의 전혀 다른 모습이 내 영혼을 일으켜 세웠다.

카말과 헤어지고 나서 애런은 산 아래에 세운 병원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곳에서 카말이 치료도 받고 복음도 더 듣게 될 거라고 했다. 애런에게서 나는 기도한 대로 믿는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애런은 하나님이 카말을 얼마든지 고치실 수 있다고 확실히 믿고서 기도했다. 애런은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기 위한 수단으로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릴 만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했다. 나도 그런 믿음으로 기도하고 싶었다. 그런 믿음으로 기도하라고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믿음을 갖고 싶었다.

 

<226쪽 중에서>

그래서 나는 예수님이 누가복음 14장에서 말씀하신 대가를 피할 유일한 길은 그분을 따르지 않는 것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절박한 상황에 처한 세상을 향해 한쪽 눈을 감은 채로 안락한 삶에 젖어 있는가?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쥐꼬리만 한 시간과 푼돈을 주면서 실질적으로는 자기중심적인 삶에 푹 빠져 있는가?

그날 그 길 위에서 나의 현주소가 분명히 눈에 들어왔다. 내가 과거에 어떤 설교를 하고 어떤 글을 썼든 상관없이 나는 여전히 언제라도 누가복음 14장에 묘사한 대로 예수님을 따르지 않을 소지가 다분한 나약한 인간이었다. 내 안에 세상의 고통에서 벗어나 안위로 흐르려는 유혹이 늘 존재한다는 현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이 유혹은 너무 강해서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삶에는 늘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내게 매일같이 새롭게 일깨워 줄 알리샤와 애런 같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자매가 반드시 필요하다.

 

<153-154쪽 중에서>

누가복음 11장은 기도에 관한 무엇을 가르치는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받고 싶다면 끝까지 문을 두드리며 요구하라. 그러면 결국 하나님이 짜증이 나서 일어나실 것이다. 우리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죽도록 귀찮게 하는 우리를 견딜 수 없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실 것이다. 그러니 어서 기도하자?

나는 이것이 이 이야기의 요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대담함이야말로 이 비유가 던지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한 가지 질문의 배경 위에 이 이야기를 그리신다. ‘겨우 빵 몇 조각을 달라고 한밤중에 이웃을 찾아갈 정도로 대담한 남자, 친구를 위해 예의를 벗어던진 남자. 이런 사람을 알고 있느냐? 아니, 네가 이런 사람이냐?’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면 한밤중에 남의 가족을 깨워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친구를 위해 문을 두드리고야 마는 대담한 사람.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 산비탈에 앉아 이 이야기를 읽다가 기도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새롭게 깨달았다. 주변 자연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노라니 온 세상 70억 이상 인구 가운데 한 명에 불과한 내가 온 우주를 운행하시느라 바쁘신 줄 알지만 꼭 부탁드릴 것이 있으니 제 말 좀 들어 보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대담한 행동인지가 새삼 느껴졌다. 대담하지 않은가? 아니, 대담함을 넘어 무례한 것 아닌가? 하지만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무례할 정도로 대담하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내게 언제 어떤 일로든 찾아오라고 말씀하신다. 특히 이 비유에서처럼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심지어 무례한 부탁도 괜찮다고 말씀하신다.

 

<300-301쪽 중에서>

깨끗한 물, 의료 서비스, 고아원, 성 노예에서의 구조처럼 이 땅의 고통을 덜어 주는 일도 더없이 중요하지만, 영원한 고통을 다루는 사역이 이보다 무한히 더 중요하다. 앞서도 말했지만 정수 필터나 식량,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나 성 노예로 혹사당하는 아이들을 구조하는 것 자체로는 아무도 천국에 보낼 수 없다. 이런 육체적 필요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며, 이 필요는 오직 복음 선포로 해결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땅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줄이자는 말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노력은 복음을 더 환하게 비춰 준다. 또한 복음을 믿으면 마음이 변화되고 교회가 세워져 이 땅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모든 종류의 사역으로 가는 문이 활짝 열린다.

이는 도전의 다음 부분과 관련이 있지만,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잠시 당연한 사실 하나를 짚고 넘어가자. 당신에게는 지금 바로 세상의 가장 큰 필요를 채울 기회들이 있다. 당신 주변에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영원한 고통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그리고 당신은 바로 이런 문제를 감당할 수 있는 해결책을 손에 쥐고 있다. 그러니 오늘, 아니 지금 당장 복음을 전해 줄 사람을 찾으라. 당신이 사는 곳에서 매일 이렇게 복음을 전하기로 결단하라.


- 차례

추천의 글

 

프롤로그. 함께 우는 능력을 잊은 기독교

준비. 어쩌다 히말라야로 떠나게 되었나

 

: 모험의 시작

Day 1.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낯선 도시에 떨어지다

 

: 무기력한 복음?

Day 2. 경이로운 절경 속에 상처투성이 세상이 있었다

: 가장 절박한 필요

Day 3. 영적 고통의 민낯을 마주하다

 

: 세상을 바꾸는 복음 공동체

Day 4. 어둠 속에서 산을 오르는 작은 빛들을 보았다

 

: 모두의 사명

Day 5. 내가 가진 것으로 누군가의 길을 비춰 주는 사람들

 

: 헌신에 따르는 대가(代價)

Day 6. 복음은 낭만이 아니다

 

: 복음의 참의미

Day 7. 통계 속 숫자가 아닌 이름을 가진 한 사람에게로

 

: 삶을 내건 결단

Day 8. ‘다른 누군가 하겠지하면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인가

 

에필로그. ‘삶 없는신앙에서 움직이는신앙으로